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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Issue(종합)★/Hot Issue(사회)

김종필의 일생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15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습니다.(나이:향년 92세) 故 김대중(DJ),김영삼(YS) 전 대통령에 이어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별세하면서 우리나라 정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트로이카 3김 시대' 는 정말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요.



이미지 출처=김종필 빈소(서울아산병원)


비록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트로이카 3김 시대'에 킹메이커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인간 김종필(JP)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일제시대인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고향)에서 태어났고...어린 시절은 대부분 부여에서 보냈습니다.  


이미지 출처=산학연종합센터:조선일보(김종필 묘비명)



이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 주오 대학 예과 독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조센징은 왜 병역의무에 참여하지 않냐?" 라고 비난한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후환이 두려워 자퇴원서를 내고 도망치듯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으나...이번엔 교생 실습 중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을 하고 때려 눕혀 헌병대 영창까지 갔다오고 보복 조치로 산간 오지의 학교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 에 얼마 버티지 못한 김종필은 결국 사표를 내고 광복이후인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학력)에 입학하였고...여기서 5.16 군사정변의 동지 김용태와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해방 후 좌익단체인 충남교육연맹 위원장이던 둘째형으로 인해 집안 전체가 좌익으로 오해받았고...자신과 집안이 좌파가 아님을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김종필은 결국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는데요. 처음엔 육군 13연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했으나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당시의 엄청난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불침번을 설때를 틈 타 탈영하였으나...이 후 자진해서 재입대(해방 후 워낙 혼란기였고 탈영이 흔하던 시대라 가능했음.) 육사 교도대에서 복부하던 중 김종필을 눈여겨 보던 중대장의 권유에 의해 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김종필 가계도(가족관계:자녀[딸:김예리 아들:김진])

이미지 출처=김종필 아내


이 후 김종필은 8기 졸업식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우등상장을 받았고 육군본부 소위로 임관하며 본격적인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1300명의 8기 졸업생 중 32명만 육군본부 배속) 여기서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이던 박정희를 처음 만났는데...김종필을 눈여겨 본 박정희가 당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미모의 조카딸 박영옥을 소개시켜줬고  둘 사이가 깊어지고 결혼하게 되면서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끈끈한 인척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는데 그 시기 김종필은 1951년 대위 진급후 미국 유학 장교단에 뽑혀 조지아 포트 베닝(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연수를 받았고...1952년 8월 부터 53년 5월 까지 6사단 19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나머지 기간은 계속 정보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젊은 시절)


이 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의 시절 김종필은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운동을 벌이다 항명파동으로 중령 강제 전역되었지만...훗날 5.16 군사 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으며 성공시킨 후 예비역 육군 준장으로 특진하였고...군사정부에서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하며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라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장 시절 민간 정치인들을 규제하고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조직하며 정치 자금조달을 위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 잠시 일본으로 떠나있게 됩니다.




군사정부의 민간 이양이 결정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김종필은 암암리에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여겨질만큼 최측근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박 대통령 친위 세력의 견제로 여러 차례 장기간 강제(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나기도 하였는데요. 이러는 와중에 1964년 미일의 적극적인 주도로 시작된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의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당시 작성한 오히라-김종필 메모는 한일협정의 초안이 되었음.)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초기에는 반대하였으나...계속된 설득과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고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된 후 국무총리가 되면서 차기 대통령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나 유신이 단행되면서 대통령의 꿈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신임 하에 2인자이자 막강한 권한을 가진 실세 총리로 군림하였고 1975년 '건강상의 이유' 로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기 전까지 4년 6개월 간 이러한 권력은 계속 유지되었는데요. 후에 회고록에서 김종필은 "박 대통령이 조카사위인데도 자신을 믿지 못하고 계속 감시하는것을 알게되면서 언제 '토사구팽' 당할지 모른다는 중압감과 스트레스에 당시 정말 몸이 아팠고...이대로 있다간 정말 훅 갈거 같아서 그만 둔 면이 없잖아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김종필 박근혜 관계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서거하자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되었고...김대중,김영삼과 '빠른 시일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어느 정도 드러냈으나...이 후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고 부정축재자로 발표되며 강제로 (일부) 재산을 헌납당한 뒤 정계 은퇴 후 미국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에 복귀한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고...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표를 얻으며 4위에 올랐으며 1988년 총선에서는 충청권을 중심으로 상당한 선전 끝에 35석을 획득하면서 캐스팅보트를 쥔 제 4당의 총재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는데요. 그러나 스탠스가 중간에 애매하게 끼어있어 한계를 느낀 김종필은 1989년 말 김영삼,노태우와  비밀리에 '의원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고 3당 합당을 단행하였습니다.(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하지만 이 후 김영삼 정권의 민주자유당 내 민주계와의 갈등 끝에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고...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대 최다 의석 3당으로 올라서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는데요. 이 후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다시 김대중과 연합(DJP 연합)하면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킹메이커' 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고...공동정부의 한 축으로 실세 국무총리직도 맡으며 외환위기 조기 극복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김종필 부인 박영옥 씨 별세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무산과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해 결국 DJP 연합은 와해되었고...2002년 제 16대 대통령 선거부터는 이미 고령의 나이와 2000년 총선 참패 등으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는데요.  이 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때 마지막 순간 동참하면서...탄핵 역풍으로 인해 자민련의 참패와 사상 첫 10선을 노리던 자신도 꿈을 이루지 못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40년이 넘는 정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그래도 공동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 물론 정치적 입장과 개인적인 주관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지만...우리 나라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분들중 한 분임은 분명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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